지금 사용하고 계신 브라우저는 오래되었습니다.
알려진 보안 취약점이 존재하며, 새로운 웹사이트가 깨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최신 브라우저로 업데이트 하세요!
오늘 하루 이 창을 열지 않음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 바로가기
서브슬라이드

게시판 내용
구원순례 22과 (욥)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9-01-02 17:22:45 조회수 62

2019년 1월 2일

사랑하는 TBC / CYCM 목사님


   2019년 새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사랑이 “구원사 성서연구-TBC”를 사랑하시는 목사님, “어린이청소년교회운동”-CYCM“에 헌신하시는 목사님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남북화해의 시작을 알리는 2018년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사랑과 돌보심 안에 품으시는 거룩한 sign이었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은 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겸허히 읽었으면 합니다. 


   2018년은 저에게 극심한 시련기였습니다. 협착증 수술에 이어 전립선 수술까지 받아야 하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그리고 많은 분들의 기도에 힘을 입어 점차 회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욥의 신앙여정을 풀어 본 <구원순례 22강>을 보내드립니다. 


   연기 되였던 제 2 회 TBC Tutorial Seminar를 2019년 1월 24일(목) 오후 1시에서 5시까지 가질 예정입니다. 저와 홍성국 목사님이 강의에 임하겠습니다. 좋은 만남이 될 것입니다. (TBC와 CYCM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설교집인 <구원순례> 제 2 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 1 판은 ‘비매품’이었지만, 제 2 판은 전국에 시판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설교모음, <신앙순례>도 출판 준비 중에 있습니다. <구원순례>가 하나님의 구원사 해석이라면, <신앙순례>는 저의 신앙고백이기에 이 둘은 한 짝을 이루는 두 개의 설교모음입니다. 그래서 두 책을 연계하여 출판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서 펼치시는 하나님의 엄중하신 구원역사를 지켜보면서 2019년은 “너희는 ...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를 외친 모세와 시편 46편 10절을 겸허히 지켜보고 또 증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새해 목사님과 교회위에 늘 함께 하시기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1월 24일 제 2 회 TBC Tutorial Seminar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주안에서


은준관 목사 드립니다.  


**제 2 회 Tutorial Seminar 문의는 문석영 목사(TBC 성서연구원 행정기획 실장 010-6465-8309)에게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순례 22

            

      목 : 욥이 말을 그친 그 순간

성경본문 : 욥 1~42장

주제본문 : 욥기 2:7~10, 4:1~9, 8:1~6, 19:1~6, 34:35~35:7, 38:1~4

      재 : TBC 성서연구 제 22 과

 

   욥기를 쓴 저자가 누구인가? 언제 쓰였는가? 그리고 어디서 쓰여 졌는가? 이 물음은 지금도 구약 학계를 뜨겁게 달구는 논쟁거리라고 합니다. 다만 욥기의 저자는 이스라엘 성현이었으나, 정작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셈 족의 에돔인이었으며, 그가 살았던 땅은 예루살렘이 아닌, 팔레스타인 남쪽 사막 끝자락 어느 지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지혜문학 중의 최고이며, 수천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칭송을 받아 온 예술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 - Martin Luther는 욥기야말로 성경 중의 가장 장엄한 작품이라고 불렀으며, ‘빅토 휴고’ - Victor Hugo는 최고의 문학작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욥기 저자를 구약의 ‘셰익스피어’ - Shakespear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기는 욥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들어 인간이면 누구나가 직면하는 삶의 질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은 삶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왜 고난을 받는가? 죄 없이 인간이 고난을 받는 것은 저주인가? 운명인가? 아니면 그 속에 신비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가? 여기서 욥은 여러분일 수 있으며, 나일 수 있기에 욥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

 

   오늘 구원순례는 여기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욥기는 다섯 막으로 엮어진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입니다. 욥기에는 ‘서막’ - prologue이 있고, 제1막, 제2막, 제3막으로 나뉘는 ‘에피소드’ - episodes들이 하나의 리듬을 이루고 있으며, 끝으로 처절한 영적 투쟁이 벌어지는 ‘종막’ - epilogue이 있습니다.


   ‘서막’ - prologue의 무대는 '우스'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우스’는 ‘팔레스타인’ - Palestine 남쪽, 에돔 지역, 또는 사막 끝자락 혹은 지금의 요르단 ‘페트라’ - Petra 그 어느 지점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욥기의 무대는 이스라엘 땅이 아니었습니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셈 족의 후예로만 알려졌으며, 오래 전 족장시대에 살았던 한 성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서막은 이 의로운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고난에 직면하는 삶의 신비, 삶의 역설에서 시작합니다. 여호와와 사탄 사이의 모종의 합의에 의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인간 욥에게 다가온 시련은 분명 이유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이유 없이 자식들이 한 순간에 모두 죽어나가고, 그 많던 재산들, 양떼들, 약대들, 소와 나귀들이 한순간에 다 죽어나간 그 순간, 욥은 갑부로부터 거지로 전락합니다. 거기에 문둥병까지 욥을 괴롭힙니다.

 

   서막은 물음 하나를 무대에 올려놓습니다. 인간은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의롭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고통은 왜 가중되는 것인가? 욥의 이유 없는 고난은 오늘 죄 없이 끝도 없이 굶어 죽어가는 이 지구촌 구석구석의 어린이들의 삶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1975년 ‘폴 포트’ - Paul Pot라는 공산주의자가 ‘캄보디아’ - Cambodia를 장악하면서 이유 없이 들로 끌고나가 처참히 살해한 300만 명의 죽음 속에 욥의 이유 없는 고난의 질문은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10년 전 ‘뉴욕’ - New York 한 복판, 알카에다의 공격으로 무너져간 빌딩안의 3,000명의 죽음 속에 또 다시 욥의 이유 없는 고난의 질문은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이웃을 사랑하며, 거짓증거하지 아니하며, 정의롭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이 세상에서는 따돌림 받고, 소외되며, 온갖 불이익을 당해야하는 여러분의 크고 작은 고통 속에 욥의 질문은 오늘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극적인 질문, 이유 없는 고난 앞에서 비극의 주인공, 욥은 여기서 제1성을 토해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탓하는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난 날이 멸망 하였더라면..... (3:3)

   그 날이 캄캄 하였더라면...... (3:4)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3:6)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3:11)

 

   그러나 여기서 욥은 이유 없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을 믿음의 사람이라 했습니다.


 ..........................................................

 

   그러나 무대가 제1막으로 바뀌면서 욥은 더욱 심각한 삶의 갈등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앞에 다가온 이유 없는 고난 때문에 자살로까지 갈 수 있었던 저주 앞에 두 개의 도전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도전은 지루하고도 긴 긴 논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논쟁은 욥의 자살을 막아내고, 욥을 삶과 신앙의 신비를 풀어가는 투쟁의 자리로 끌어들였습니다.


   바로 그 처음 도전은 뜻 밖에 아내로부터 온 도전이었습니다. 남편이 당하는 이유 없는 고난 앞에서 아내는 의당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며 그 눈물을 공유해야하는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욥의 아내는 욥의 가슴 속에 비수를 꽂는 욕설로 도전해온 것입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 (2:9)

 

   당신처럼 의로운 사람을 저주하는 신은 신이 아니거나 거짓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저주하고 차라리 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욥의 아내는 지금 ‘무신론적 허무주의’ - atheistic nihilism라는 역사의 무서운 한 흐름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의 이유 없는 비극을 방치하거나 방관하는 신은 신이 아니기에 그 죽음을 선포하라는 말입니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 - Nietzsche와 20세기 신학자 ‘토마스 앨타이저’ - Thomas Altizer를 통해 욥의 아내가 내세운 ‘무신론적 허무주의’는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독일 나치스들에게 처참히 생매장되어 눈앞에서 죽어가는 부모와 친척을 목격하고 있던 유대인 철학자, ‘마코비츠’ - Markowitz는 3000년 전의 출애굽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를 절규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유 없는 고난 앞에 침묵하는 하나님보다는 차라리 혁명으로 썩어진 체제를 뒤집는 공산주의로 가리라고 선언하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무신론적 허무주의는 지금 이 땅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때로는 ‘안티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때로는 숨어서 “이 역사의 비극을 외면하는 신은 욕하고 죽어라!”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때 욥은 수세에 몰렸고, 오늘의 기독교는 이 도전 앞에 할 말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도전보다 더 심각한 도전이 욥에게 닥쳤습니다. 친구들이라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욥을 위로하러 온 것입니다. 욥을 본 순간 그 비참한 모습에 놀란 친구들은 통곡하고 7일 동안 욥과 함께 있으면서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돌아갔더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7일이 지난 후 친구 셋은 죽어가는 욥을 상대로 긴 긴 논리로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3대 1의 열세에 몰린 욥을 향해 친구 셋은 각기 다른 ‘톤’ - tone으로, 그러나 한 가지 저주를 계속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냐?’(4:7) 엘리바스의 말이었습니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8:4) 빌닷의 말이었습니다.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11:14) 소발의 논조였습니다.

 

   숨겨둔 네 죄가, 아니면 네 자식의 죄가 너를 지금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저주였습니다. 죄와 벌의 뗄 수 없는 인과관계가 너 욥이 죽어가는 숨은 이유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을 ‘도덕주의적 허무주의’ - moralistic nihilism라고 합니다. 잘못을 범한 죄과가 저주와 죽음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와 일본의 쓰나미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에서 온 것이라고 정죄한 한국 목사들의 저주 뒤에는 이 도덕주의적 허무주의가 깔려 있었습니다. 비극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항상 너에게, 네 속에 숨겨놓은 죄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오늘 이 민족의 위기는 정치계, 경제계, 종교계, 아니 심지어 젊은 세대에게까지 깊숙이 물들인 ‘네 탓’, 나는 옳고 너는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저주하는, 이 도덕주의적 허무주의라는 위선에 있다고 보입니다. 여기서 욥은 꼭 같은 도덕주의적 허무주의로 응수해 나갔습니다. 


‘나도 너희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12:3) 


   그러나 욥은 여기서도 하나님만은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긴 긴 논쟁 속에서도 욥은 신앙만은 굳게 지켰습니다. 결국 아내와의 논쟁, 친구들과의 논쟁은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제1막은 그 커튼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


   이제 욥기는 제2막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제2막은 욥이 홀로 벌인 긴 긴 영적투쟁을 그 ‘에피소드’ - episode로 하고 있습니다. 긴 긴 욥의 영적 투쟁은 자신에게 이유 없는 고난이 닥친 그 순간부터, 그리고 아내가 자신을 저주하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 그리고 친구들과의 긴 긴 논쟁을 거치면서, 그 속에서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과의 영적 싸움으로 이어갔습니다.

 

   욥이 통과한 영적인 투쟁은 세 단계를 거쳤습니다. 1단계는 이유 없는 고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단계였습니다.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갈지라.’(1:20) 운명주의처럼 보이는 이 독백 뒤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은 포기하지 아니하는 욥의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2단계로 넘어서면서 부터였습니다. 아내와 친구들의 도전에 저항하면서 오히려 욥은 서서히 자기 자신의 의와 지혜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논쟁이 가열될수록 욥은 자신의 의와 신앙을 정당하다는 자신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은 저주하거나 욕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욥은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신앙의 경지에까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에 돌입합니다. 친구들의 논리를 다 잠재우고 난 후였습니다. 실은 신앙의 투쟁에서 승리한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끝내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 욥이 하나님을 붙잡고 담판을 걸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과의 담판을 자기 자신이 벌려온 영적 투쟁의 마지막 승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 하리이다 ......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13:22~23)

 

   고난 가운데서도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저주하지 아니한 신앙을 이제 자신의 의와 공로로 삼아 하나님을 협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욥은 지금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적 허무주의’ - Religious nihilism라 합니다. 우리가 성취한 종교적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지금 욥은 ‘종교적 허무주의’ - Religious nihilism에 빠져 자기가 세운 신앙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과 협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바로 이 수렁에 쉽게 빠져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룩한 신앙의 업적을 들고 지금 하나님과 거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지켜온 신앙과 의를 가지고 지금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맞바꾸려는 무서운 교만, 종교적 교만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거룩을 빙자한 위선’이었습니다.


 .................................................


   바로 이때였습니다. 뒤늦게 찾아 온 젊은 친구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이것이 제3막입니다. 여기서 엘리후는 다른 세 친구들이 보지 못한 종교적 위선, 거룩을 빙자한 욥의 위선을 보았습니다.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하려는 욥의 내면, 숨어있는 교만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욥을 향해 입을 열었습니다.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였고,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떠나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34:5~9) 


   지금 엘리후는 철저히 종교적 허무주의에 빠진 욥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하나님이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35:5.7)

 

   성경을 잘 보십시오. 이때 깜작 놀란 욥은 그때서야 말을 그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네 의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위선적이냐를 경고하는 엘리후의 말에서 욥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의로 하나님과 쟁론하던 욥이 비로소 자신을 비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


   욥이 말을 그치는 그 순간! 그 순간부터 종막이 시작되었습니다. 욥이 쟁론을 그친 바로 그 때, 하나님은 긴 긴 침묵을 깨시고 욥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계속 말하는 동안엔 오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말을 그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자기계시라 합니다.

 

   폭풍우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계시의 통로 일뿐입니다. 욥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고통을 잘 참아냈다고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은 욥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38:4)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38:16)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38:33)

 

   이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이 우주와 역사 그리고 인간하나 하나, 너 욥까지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 지금도 이 우주와 역사의 운행을 친히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너는 하나님 안에 있는 티끌,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만 호흡하는 나약한 피조물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유 없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는 계시의 통로였습니다. 이때에 비로써 욥이 처음으로 회개합니다. 욥의 회개는 하나님을 눈으로 뵌 후에 일어난 자기포기였습니다. 귀로만 듣던 종교가 깨지고, 눈으로 대면하는 만남의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욥이 받은 마지막 축복은 고난을 이겨낸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유 없는 고난!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닙니다. 이 우주와 역사, 우리의 생명과 죽음까지도 하나님 안에 있다는 신앙의 신비를 열어 가시는 사랑과 계시의 통로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신비와 기쁨이 있습니다.

facebook tweeter line
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수
[공지]제 8 회 TBC Tutorial Seminar 소식이미지관리자2019.10.1517
[공지]C국 현지 교회지도자 세미나이미지관리자2019.09.2716
[공지]“성서연구로 목회 패러다임을 바꿔보는건 어떤가” (당당뉴스 11월 29일 기사)관리자2018.12.06136
54제7회 TBC 튜터리얼 세미나 소식이미지관리자2019.09.0953
53제6회 튜터리얼 세미나(Tutorial Seminar) 소식이미지관리자2019.06.27115
52(2019년 7월) 제7회 TBC 튜터리얼 세미나 (Tutorial Semainar)관리자2019.06.2737
51은준관 박사의 <신앙순례> 첫번째 이야기관리자2019.05.2385
50은준관 목사의 설교집 <구원순례> 이미지관리자2019.05.2168
49목회박람회에서 소개된 <TBC 성서연구>이미지관리자2019.05.2150
48(2019년 6월) 제6회 TBC 튜터리얼 세미나관리자2019.05.1851
47제1회 교육목사 콜로키움(colloquium) 소식이미지관리자2019.04.1951
46제5회 TBC 튜토리얼 세미나 (5월 2일)관리자2019.03.16136
45제1회 교육목사 콜로키움 (4월 4일)관리자2019.03.1655
44감신 신학생 작은 세미나 소식 (2월 7일)이미지관리자2019.03.0584
43제4회 TBC 튜토리얼 세미나 (3월 21일)관리자2019.02.2668
42제3회 TBC 튜토리얼 세미나 소식이미지관리자2019.02.2645
41제2회 튜터리얼 세미나 소식이미지관리자2019.01.2793
40제3회 TBC 튜토리얼 세미나 (2월 21일)관리자2019.01.2556
>> 구원순례 22과 (욥)관리자2019.01.0262
38제2회 TBC 튜토리얼 세미나 (1월 24일)관리자2018.12.2656
123